Tiny Fingers Crossed

 

-저기 나오는 사람, 윤기 형 아닌가.

-너 저 선배 누군지 알아?

-, 알지. 고등학교 때 선배.

-저 선배 소문 안 좋은데.

-

-음대에 남창이라고 소문 다 났잖아.

-

-교수들한테도 대준다더라.

-

-너 그 센빠이 교수 알지?

-.

-걔한테 매일 수업 끝나고 대준다는 소문이 있지.

 

 

박지민 X 민윤기

 

 

지민은 돈이 많았고 태형은 호기심도, 아는 것도 많았다. 사실 둘도 없는 조합이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돈 많은 철부지 대학생과 여기저기 소식만 밝고 단순한 대학생이 붙어 다니는 것은 흔하디흔한 클리셰와도 같았으니까. 어쩌면 그들에게는 세상이 살기 쉽고 뻔한 곳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뻔한 곳도, 공평한 곳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쪽과 못 가진 쪽으로 세상을 이분하고는 했지만 때로는 절박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있기도 했다. 민윤기는 절박한 쪽에 속했다. ‘씨발년아, 비싸게 굴지 말라고 했지.’ 하면 설설 기어야 하는 쪽이기도 했고, 자기 밥줄이야 끊어져도 상관없지만 꿈이 끊기는 건 지독하게 피하고 싶은 쪽이기도 했다.

 

꿈이 절박했던 민윤기가 했던 일은 간단했지만 설명하기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뭣도 모르는 고등학생 때부터 좀 꼴리게 생겼다는 소리를 숱하게 들어왔던지라,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은 한 순간이었고, 그리 두려운 일도 아니었다. 시커먼 남자 녀석들만 드글대는 남고에서도 민윤기의 뒤에다 갖다 박는 것이 소원인 아이들도 제법 있었으니까, 윤기에게 썩 먼 나라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절박하다고 해서 그 일에 닥치는 대로 뛰어들 만큼 그가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돈이 간절했다. 남창 노릇을 할 만큼 멘탈이 썩어 문드러진 것도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돈이 정말이지, 간절했다.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한 번 뚫리고 나면 그 이후는 이렇다 할 죄책감 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던가, 민윤기의 도덕성과 인간성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곧 인간이었다. 인간이기 위해, 그는 인간답지 못한 일을 했다. 그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면서도 괜히 비싸게 구는 일이 잦았다. 비쌀 수 없으니 싸보이지 않으려 온갖 힘을 썼다. 안타까운 과거를 숨기려 미래가 밝은 척 하는 것처럼, 그는 괜시리 빛나는 척 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더러운 현실을 잘 알았다. 최저 임금 따위로는 제대로 막아낼 수도 없을만큼의 음대 학비를 대느라 빚은 쌓였고, 그걸 갚아낼 힘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꿈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사회에 나와서 맨 처음 더럽다고 생각했던 것이 돈 때문에 원하는 것을 많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넉넉하게 산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하게 산 것도 아니었다. 음대에 진학시킬 정도로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듯하게 살줄은 몰랐던 윤기였다. 2년은 장학금을 받아 버텼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차에 김석진 교수를 만났다.

 

 

-피아노 기가 막히다.

-,죄송해요.

-아냐, 계속 쳐봐.

 

 

윤기가 텅 빈 강의실에서 홀로 연주하고 있던 그 피아노는 김석진 교수의 것이었고, 윤기는 당황했지만 자신의 꿈을 써내리듯 피아노를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석진은 윤기에게, 내 동생도 딱 그 또래야, 나 보기보다 엄청 젊어,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동생처럼 생각해도 되겠느냐고 넌지시 물어오는 바람에, 윤기는 아무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때야 아무 생각도 없었고, 큰 잘못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었다.

 

수업의 시작과 끝을 칭찬과 살가운 대화로 가득 채우기로 유명한 김석진 교수였다, 남학생들에게는 게이 같다는 평을 듣기 일쑤였으나, 여학생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껌뻑 죽어나가고는 했다. 갖은 칭찬에도 다소 무신경한 윤기에게 다정한 눈짓을 보였다. 수업이 끝나고 잠깐 남아달라는 부탁 끝에 흘린 미소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오래 남는 것이었다. 윤기는 순간 아주 잠깐, 정말 잠깐이지만, 그의 미소가, 그 해맑은 미소가, 수많은 여학생들의 마음을 빼앗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차 한 잔을 빼오며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어오는 통에 윤기는 그만 아무 말은 하지 못하고 빙긋 웃기만 했다. 윤기가 사회 생활을 하며 느낀 것은 남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흔한 진리였으나, 때로 제 눈 앞의 교수는 그 범주에는 해당되지 않는 순진한 샌님일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윤기는 석진의 웃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 순해 빠져서는, 제 뒤에 어떤 소문이 붙어 다니는지 알면 한참을 충격 받겠다고 생각했다.

 

-편하게만 봤는데, 재능이 많구나?

-?

-곧 잘하네, 뭐든지.

-

-나한테 작곡 배워보지 않을래?

 

그 해사한 눈웃음이 저에게 물어오는 말을 제대로 생각해볼 새도 없이 윤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저에게 편하게 속을 드러내보이는 그에게는 왠지 그래도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많다며 정상적인 어투로 꿰어낸 것이었으나 윤기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짜고짜 석진은 윤기를 피아노 의자에 앉혔다. 윤기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쥐고는 별 다른 뜻은 없다는 눈을 하고서는 그의 뒤에 바로 섰다. 코드 잡는 건 알 테고, 말끝을 늘이면서 살짝 톤을 높이는 버릇이 있는 듯 했다. 윤기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자 그는 눈을 지그시 떴다.

 

자알생겼다, 싶은 얼굴이었다. 너무도 정직해보이고 순해 보여서 그만 거짓말을 해도 그게 진실일 것처럼 믿어주고 싶은 눈이었다. 이내 정적을 깨고 벨소리가 울렸다. 또 시작이다, 윤기는 익숙한 번호를 보고 표정을 팍 썩힌 채 전화를 받았다. 학비 독촉 전화였다. 독촉하는 사람은 독촉하는 것이 업무였고, 독촉받는 사람은 독촉받는 것이 업보였다. 석진은 우물쭈물하며 어려운 얘기를 꺼내서 미안하다는 듯이 윤기에게 물었다.

 

-.. 윤기야.

-?

-학비 감당하기 힘들지?

-.., 하는 데 까지는 해봐야죠.

 

-나는, 니가 돈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재능이 아깝잖아.

-

-너는 내가 본 학생 중에 최고거든.

 

윤기는 자신을 내치고 버린 세상 속에서 활짝 아프게 웃는 석진을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해맑기만 한 것인지, 도통 알 겨를이 없는 그는 토악질 나는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어 종종 눈을 감고는 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은 암막 커튼으로 가린다고 가렸으나 이내 벌어진 틈으로, 그리고 강의실의 천장부터 바닥까지 가득 채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석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연주해보자며 셔츠 깃을 매만졌다. 이내 그의 목선이 눈앞을 가득 메웠고, 윤기는 어쩔 줄 몰라 침을 꿀꺽 삼켰다. 강의실 안이 너무 조용한 나머지 자신이 긴장했다는 것이 석진에게 들키지나 않았을까, 아니 들리지는 않았을까 민망해하던 찰나, 석진은 윤기의 목을 잡고 고개를 고정시켰다. 윤기의 시야에는 석진의 무표정한 얼굴이 가득 들어 찼다. 석진이 무슨 향수를 쓰는지 맞힐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그러나 윤기는 하나만은 알 수 없었다. 석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째서 그 해사한 미소를 다 지워버렸는지.

 

-윤기야, 돈이 참 더럽다, 그치?

-

-, 그건 냄새도 별로구.

-주실 것도 아니면서, 저 진짜 괜찮..

-줄까?

 

 

윤기가 도발적인 석진의 말에 놀라 고개를 확 쳐 든 순간, 석진은 윤기의 목 언저리에서 나는 향기가 달다고 생각했다. 돈 같은 거랑은 비교가 안 되게 다디단 그의 몸이 그만 석진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다 내어 주고 싶은 느낌이었다, 아니, 우선 그 몸 구석구석부터 어떻게 한 다음에, 아니, 아니.

 

 

-제가 맨 입으로 어떻게 덥석 받아요.

 

 

거칠게 혀를 밀어 넣었다.

 

 

-이젠 맨 입 아니잖아.

 

 

 

*

 

 

", 아흣, , 교수님."

"입맛 떨어지니까.. 이름 부르랬지, 윤기야."

 

 

 

윤기는 뒤를 내어주고 난 날이면 스스로도 수치심에 못 견뎌했다. 맨 정신에 할 만한 짓은 아니었으니,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수치심을 넘어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은 역시, 석진의 것을 입으로 핥을 때였다. 단순한 섹스와 오럴 섹스가 어떤 차이냐고 묻는다면, 윤기의 위에 석진이 올라타 그를 고스란히 내려다보며 성취감과 정복욕에 찌든 미소를 보일 때, 그것을 홀로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윤기는 그 미소와 처음의 미소를 겹쳐보았다. 같지만 다른 것이어서 더욱 두려웠다. 그 눈으로 다른 민윤기들을 만들어왔을 것이 두려웠다. 그의 정복욕에 과연 몇 사람이 당해왔을지 두려웠다. 가끔 그가 예전의 미소를 띄고 빨아보라며, 좀 즐길 수 없냐고 우습지도 않은 우스갯소리를 할 때면 괴로웠다. 더 이상 학비 독촉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으나 머리는 다른 문제로 복잡했다. 윤기는 저 스스로도 이런 모멸감을 견뎌내기 힘들어 했으나, 그 때마다 도서관에서 시집을 읽는 것으로 더러운 기분을 해소해야만 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비슷한 날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해가던 그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서기 전까지는.

 

안녕하세요-”

, 안녕.”

 

나긋나긋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며 짓는 미소에 팍 기분이 상해버린 윤기였다. 누군가 웃는 얼굴만 봐도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지민은 굳이 고개를 돌려 피해가려는 윤기를 다시금 막아섰다.

 

"비켜."

선배, 저 모르시겠어요?”

알아야하나.”

저 강북고 나왔어요.”

내가 강북고 나온 새..”

 

내가 강북고 나온 새끼들 다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너를 어떻게 아냐하고 모른 척 지나가려던 그였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너무도 낯이 익은 얼굴이라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내 눈이 마주치자 씩 눈웃음을 치는 지민에게서 석진의 눈을 본 윤기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후배 녀석들이 눈웃음을 살살 치며 말을 걸어올 때면 대부분 술을 사달라고 하거나 밥을 사달라고 하거나,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였다. 근데 왠지 이 새끼는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윤기의 촉이 생각보다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가만 보니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상판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여기저기 싸움 걸고 다니면서 안하무인 재벌 2세 티를 팍팍 낸다던 그 녀석인가 싶어 아래 위를 쓱 훑었다.

 

, 수업 끝나고 뭐하세요?”

“...”

 

개인교습 그런 거 그만하고, 저 과외 좀 해주세요.”

,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냐?"

"솔직히 말할까요?"

 

어디가서 신경전으로 꿀려본 적이 없던 민윤기는 우습냐는 기찬 물음에도 전혀 쫄지 않는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솔직히 말할까요, 라니. 하늘 같은 선배한테 지금 이래도 되는 거야, 세상에 마상에. 새삼 꼰대질을 하던 자기 한 학년 선배들을 떠올리며 한 마디 하려던 찰나, 선빵을 날리기라도 하듯이 들려오는 한 마디에 그만 엎어질 것 같았다.

 

"그런 거 그만하고, 차라리 제 돈 받는 게 어때요?"

"너도 소문 같은 거 듣고 내가 우스워 보이나본데."

 

"형을 살 수만 있다면 사고 싶어요."

"..미친 새끼가."

"나는 재능 같은 거 없어요, 대신 돈이 많죠."

"."

"형은 돈이 없는 대신 재능이 많죠."

 

구구절절 맞는 말만 늘어 놓는 그 녀석이 여간 아니꼬운 게 아니었다. 윤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벙찐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사고 싶다니,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사고 팔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막상 팔리고 있는 저의 몸뚱아리를 바라볼 때면, 몸에는 피가 아니라 증오가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윤기를 앞에 둔 지민은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저한테 팔려 주면 안 될까요, 하고, 아주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기가 찬 윤기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한 드라마 속 명대사와 닮은 말을 읊었다.

 

 

"얼마나 줄 수 있는데?"

 

지민이 생각하지 못한 반응에 놀란 사이 윤기는 이때다 싶어 쏘아 붙였다.

 

", 강북고 안하무인이라고 소문났던 새끼지?"

"..."

"아는 것도 없이 괜한 사람 건들지 마."

"..."

"사회는, 고등학교랑 달라, 너도 나이를 쳐 먹었으면 변할 줄 알아야지."

 

얼마든지 주겠다는 치명적인 말에 다시 한 번 속을 윤기가 아니었다.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그와 닮은 지민의 말에 윤기는 죽일 듯이 노려 보며 달려 들었다. 그러나 박지민은 굴하지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 같은 박지민.

 

 

 

, 진짜 많이 변했네요.”

 

이런 엿 같은 날이면 그게 누구든 간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윤기는, 대꾸 없이 지나치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렇게 말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 좆만아, 세상은 원래 변하는 거란다.’ 하고 세게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제 눈앞의 그 좆만이가 재벌 2세 쯤 된다는 것을 이미 안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서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그래 좆 같은 건 내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하고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가 고개를 돌리고 휙 지나치려 할 쯔음, 지민은 머리가 한참 어지러웠다. 제가 알던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만 같은 기분에 취해 그만 모든 것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형은 기억 못할지도 모르는데요.”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들어 앉아서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은 그 아이의 우상이 저였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윤기는 그를 종종 걸음으로 지나쳤다. 윤기가 점점 멀어지며 도서관 쪽을 향해 갈 때, 지민은 저만치 멀어지는 그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꿋꿋이 남은 말을 이어 갔다. 윤기에겐 들리지도 않을, 어쩌면 저만 똑똑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내 전부였어요."

 

 

민윤기는 잠시 멈춰 섰다. 들은 것일까, 아무 말 하지 못한채로, 박지민은, 그 순간 문학 시간, 보라는 책은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창밖만 줄창 바라보던 자신을 떠올렸다. 쌀쌀한 초봄 날씨에 켜 놓은 히터 소리만이 가득한 교실 안, 누군가가 시를 읊고 있었던 것 같다. 고스란히 그 시를 기억하려 애쓴다. 어쩌면 창밖의 그와 맞닿고 싶었던 자신이 기억하는 그 때로, 그 영원한 때로 돌아가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조용한 가운데, 심장이 소란스레 뛰었다. 마치 농구공을 들고 이리저리 뛰는 그와 함께 뛰고 있기라도 한 듯이, 심장이.

 

-유독, 황인찬.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이게 대체 무슨 냄새냐고.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시를 읊는 소리가 들리고, 지민은 창밖의 그와 자신만 남겨둔 채 모든 것을 지웠다. 귓가에는 시만 가득했고 눈에는 그만 가득했다.

 

-너는 정말 예쁘구나.

 

심장이. 그리고 그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뛰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그리고 그 누구도, 저렇게 예쁘게 뛴 적이 없었다. 지민은 그림자마저 예뻤던 그 날의 윤기를 떠올렸다. 뭐라고 말해야하지, 무어라고 고백해야하지, 수많은 고민이 엉겨붙은 지민의 머릿속은 복잡했었다.

 

그 형이 피아노 특기생으로 음대에 진학한다는 소문만 들었다. 음악, 사실 악보도 볼 줄 모르고 이래저래 복잡한 건 싫어했던 지민은 아버지 힘을 조금 빌려 무작정 음대에 가겠다고 했다. 물론 당연히 윤기가 있는 그 곳이어야만 했다. 같은 학교 학생이 되어 마주칠 일이 생기고, 기회가 생기고, 자유가 생기고, 그를 바라보기만 하면 자연히 그를 가질 수 있는 줄만 알고.

 

 

이내 기회도, 자유도, 마주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지민은 아득해졌다. 심지어 돈마저, 그래, 어쩌면 지민은 필요 없다는 윤기에게 묘한 오기가 생긴 것만 같았다. 들려오던 소문마저 미웠다, 윤기의 당당한 태도에, 지민은 생각했다. 그래, 윤기 형이 그럴리가 없지. 어쩌면 그저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윤기도 저를 믿어주었으면 하는 것인지, 전에 없이 싱그럽게 웃었다.

 

 

종종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해 가는 윤기를 어김없이 가로 막은 것은 지민이었다. 좋은 말을 들은 적이 없으면서도 매일 같이 가로막는 지민이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은 개나 줘버리라며 매일 같이 화를 내는 윤기나,

 

지독한 악연이었다.

 

 

", 오늘도 가요?"

"비켜라."

"기분 안 좋은 거 보니까 갔다 온 거구나."

"미친 새끼."

"잘 가요."

"..."

", 도서관에 물어 봤는데, 매일 시집만 읽는대서-"

"..."

"이건 선물."

 

 

잘 가요, 하고 건네는 상냥한 인사가 지민에게는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윤기는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매일 매일을 그저 하루 같이 지냈던 그에게 지민의 인사는 꽤나 간헐적이고 충동적이어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윤기는 끝내 읽던 시집을 탁 덮어 놓은 채로 되뇌였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벌컥 화를 내고는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표현한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음을 알았다.

 

선물이라며 건넨 시집은 한 장이 꼭 접혀 있는 채였다. 황인찬 시인의 시집, 유독이라는 시, 그리고 그 와중에도 한 구절.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너는 나에게 시집이 아니라 이 말을 선물하고 싶었던 거였을까. 윤기는 조용히 생각했다. 투박한 이 말로 모든 것을 전하려는 지민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다면 그것은 거짓말일까.

 

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 있었다.

 

윤기는 흔들리고 있었다.

 

 

 

*

 

 

 

"교수님, , 돈 돌려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그걸 왜 돌려줘, 윤기야."

"돌려드려야죠, 제가.."

 

"니가 갚고 있는데, 뭐하러 돌려줘."

"교수님."

"...윤기야, 잘 생각해."

"저 그만 하고 싶어요."

"돈은 더러운 거야, 제 값을 하는 거지."

 

 

이내 눈 앞이 아득해졌다. 또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배신감에 윤기는 지민이 두려워졌다. 눈조차 마주칠 수 없을 것만 같은 트라우마, 그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값을 치르던 악몽같은 날들이 뇌리를 스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 몸을 더듬어 오는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완력을 쓰는 석진에게 당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색을 밝히는 그가 두렵고 역겨웠다. 윤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틀어 막았지만 모든 퇴폐는 그 입을 뚫고 새어 나왔다.

 

 

석진은 발갛게 달아오른 윤기의 얼굴을 살짝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윤기의 페니스를 움켜 쥐었다.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다.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좋지 않은 섹스의 연장선이었다. 언제였을까,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지민이 문을 살짝이 열고 강의실로 들어와 처음 본 장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입술과 입술 사이로 축 늘어지는 침이 새하얗게 질린 윤기의 몸을 적실 때였을까, 아니면 좀 더 격렬한 정사를 나눌 때였을까, 아니면, 그것도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뭘 좀 두고 가서요."

"얼른 챙겨서 나가."

 

 

김석진 교수는 아무래도 좋다는듯이 나른하게 말했다. 정작 두려워진 것은 윤기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소문은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는 걸까, 나는 얼마나 우스워질까. 나는 어느 정도까지 우스워질 수 있는 걸까, 윤기는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을 늘어 놓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이내 지민은, 윤기의 손을 확 잡아 끌었다.

 

 

"제가 두고 간 게 형이거든요."

"..."

"아무리 생각해도, 얼른 챙겨서 나가야 될 거 같아서요."

 

 

*

 

 

"너도, 내가 더럽지?"

"."

"..."

"언제쯤 그만 둘 건데요."

 

"난 언제쯤 죽어야 될까."

"내가 그렇게 싫어요? 죽을만큼?"

"좋아하면 더 큰일이지."

"..."

 

흐르는 침묵 내내 윤기는 시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하고는 이내 지친 몸을 지친 팔로 부둥켜 안고 폭삭 주저 앉고 만다. 울어요? 하고 물어 오는 당황한듯한 지민의 목소리에도 대답 없이 히끅- 소리만 낸다. 몸을 파르르 떠는 윤기를 조용히 안아주는 것은 지민의 몫이었다. 그렇게 아득하게 익숙해져 버린 지민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힘도, 그럴 마음도 없어져 버린 윤기였다. 손목에 난도질을 하고 눈을 조심스레 감을 때와 같은 몽롱한 기분이었다.

 

 

 

, 나는 형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이제와서, 싫어하니?”

그건 아니지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적어도, 형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

형 마음이 아직 제자리에 도착 안 한 것뿐이에요.”

 

 

윤기는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홀로 생각했다. 너는 이제 스물이고 나는 스물 둘이었으며 우리는 어른이므로, 잠깐 거짓말 같은 감정에 내몰린 것이니 흔들리지말고 이대로 사는 것이 좋겠다고. 이내 들려오는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 나는 형을 좋아하는 게 맞나 봐요.’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헤벌쭉 웃는 그를 가만히 볼 수 없었다. 또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홀로 좋아하던 시를 읊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요, 하고.

 

같은 순간 지민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윤기를 한참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래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것의 침묵은 불안하고 또 불길한 걸까. 조용한 그 순간 적막을 깨고 마음을 고백했을 때, 역시 돌아온 대답이 침묵이었음에 보다 착잡한 생각만 가득했다. 헤벌쭉 웃으며, 그는 스스로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불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음에 감탄하고 두려워했다. 하고 많은 것 중에서도 지민이 한 것은, 사랑이었다. 가여운 감정이었다.

 

 

"안 좋다고 누가 그래."

"그 말, 무슨 뜻이예요?"

"좋아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단지 등쳐먹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보지 않아도, 적어도 윤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망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짓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년을 동원하는 일이었으나, 제법 어중간한 기간 내에 윤기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박지민이라는 영계에게 세상의 쓴 맛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도 전에, 스스로 씁쓸한 것을 입에 물고 있었다. 윤기가, 널 좋아하기엔 내가 너무 탁하지, 하고 속의 것을 다 끄집어놓았을 때, 지민은 아무렇지 않게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하며 확인 시켜주기라도 하듯이 웃는 그의 앞에서 다시 불결해지는 것은 윤기였다. 그래, 나를 좋아하는 니가 너무 딱하다.

 

 

윤기는 차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몇 번을 고사하고 그냥 비슷한 감정으로 치부해버리면 언젠가 떨어져 나갈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었으나, 윤기의 눈에는 그저 딱하기만 했다. 따로 고백할 필요도 없이 저의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모두 아는 박지민이라면, 나를 팔아도 괜찮지 않을까. 민윤기의 증오가 끝을 향해 달려가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로 빨간 줄이 덧대어지고는 했다. 욕조 옆 바디워시 바로 근처에 놓인 커터칼을 제자리에 놓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매번 달랐다. 가끔은,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우위를 점하기도 했고, 이대로 그가 죽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지금 흘러내리는 이 피가 나의 것이 아니라 김석진 교수의 우월하고 선량한 유전자가 섞인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스스로를 불결한 살인마로 치부해버리는 것이었다.

 

머릿 속으로는 몇 번을 죽이고 찌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를 좋아해버리면, 윤기는 또 다시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해도 될까."

"얼마든지요."

"그래, 좋아해."




월간 슙총에 올렸던 거! 짐슈였슴미다.. 우주대지각... 죄송해여 츕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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